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 나의 눈에 미얀마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는 광활한 토지에 보석은 물론 석유와 천연가스, 목재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5,000만에 달하는 인구 등 미얀마의 미래를 밝게 하는 많은 가능성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기관은 미얀마 농업관계부(Ministry of Agriculture & Irrigation) 산하기관인 농업연구국(Department of Agricultural Research)의 벼 육종 연구 개발과이다.
농업연구국 본부는 미얀마의 수도 양곤으로부터 고속도로를 따라(편도 1차선을 조금 넘는 크기의) 북으로 350km 떨어진 예진에 위치하고 있다. 예진은 미얀마 지도에서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찾기 힘든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다. 기관 밖에는 전기도 전화도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여기에는 미얀마 농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기관인 미얀마 유일의 예진 농업대학교, 예진수의대학교, 예진임업대학교와 아울려 임업연구소와 농업연구국이 함께 위치해 있다.
여기에서 나의 이름은 ‘아웅킨’이다. ‘이병곤’이라는 나의 이름은 몰라도 우리 연구소 400명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동네 꼬마들 모두 나를 아웅킨으로 부른다. 아웅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어느덧 나와 그들 사이에는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Hybrid Rice 관련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과는 여래 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팀이 Hybrid Rice 전담 팀이다.
미얀마 현지 연구원 ‘도뭬뭬’와 ‘도이이민’과 함께 100% 순도의 종자 생산과 각종 수량검정, 비료 적응 시험 등을 수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도 나가야 하는 고된 업무가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졌지만 어느새 벼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큼 나의 일에 푹 빠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때때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동료 연구원들과 그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임지 배치 첫날부터 동료 직원들의 어마어마한 호기심 덕분에 쉬지 않고 말해야 했고 덕분에 미얀마 어디를 가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미얀마어가 늘기는 했지만 늘 집에 돌아오면 아픈 입을 달래야 했다.
지난 설날 아침, 평소처럼 출근해서 필드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부서 과장님이 연구원 전부를 급히 필드 사무실로 소집했다. 무슨 중요한 회의가 있는가보다 하여 달려갔는데 눈앞에는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영문을 몰랐던 나에게 우리 쎄야마(‘여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나는 우리 과장님을 이렇게 부른다)께서 한국 드라마에서 봤는데 한국에서 설날에는 이렇게 하고 세배하는 거라시며 세배를 다 같이 하자고 하셨다. 우리 연구원들은 어머니와 같은 쎄야마께 세배를 드렸다.
평생 잊지 못할 설을 이곳 미얀마에서 맞은 그날 밤, 정전이 되었다. 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의 촘촘한 별들, 개구리와 벌레들의 울음소리, 정으로 가득한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은 평생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도킨딴누웨, 카인자윈, 카인자나인, 초초아웅…그들의 이름과 함께….
이곳에서 나는 Hybrid Rice 관련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과는 여래 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팀이 Hybrid Rice 전담 팀이다.
미얀마 현지 연구원 ‘도뭬뭬’와 ‘도이이민’과 함께 100% 순도의 종자 생산과 각종 수량검정, 비료 적응 시험 등을 수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도 나가야 하는 고된 업무가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졌지만 어느새 벼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큼 나의 일에 푹 빠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때때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동료 연구원들과 그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임지 배치 첫날부터 동료 직원들의 어마어마한 호기심 덕분에 쉬지 않고 말해야 했고 덕분에 미얀마 어디를 가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미얀마어가 늘기는 했지만 늘 집에 돌아오면 아픈 입을 달래야 했다.
지난 설날 아침, 평소처럼 출근해서 필드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부서 과장님이 연구원 전부를 급히 필드 사무실로 소집했다. 무슨 중요한 회의가 있는가보다 하여 달려갔는데 눈앞에는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영문을 몰랐던 나에게 우리 쎄야마(‘여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나는 우리 과장님을 이렇게 부른다)께서 한국 드라마에서 봤는데 한국에서 설날에는 이렇게 하고 세배하는 거라시며 세배를 다 같이 하자고 하셨다. 우리 연구원들은 어머니와 같은 쎄야마께 세배를 드렸다.
평생 잊지 못할 설을 이곳 미얀마에서 맞은 그날 밤, 정전이 되었다. 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의 촘촘한 별들, 개구리와 벌레들의 울음소리, 정으로 가득한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은 평생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도킨딴누웨, 카인자윈, 카인자나인, 초초아웅…그들의 이름과 함께….
Source: http://www.koica.go.kr/WEBZINE/2005-spring/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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